[안전파수꾼] 안전작업 활동 주체들의 역할 |
“그렇게 하니 일이 더디지. 장갑을 벗고 하라고 했잖아.” 사다리차로 계속 이삿짐이 들어오는 상황이라 아파트 거실에서는 여러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발코니 쪽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발코니 창을 통해 올라온 짐을 면장갑을 낀 채 끌어내리는 직원에게 작업반장이 고함을 쳤다. 비가 올 때는 면장갑이 더 위험하니 짐을 맨손으로 들어야 미끄러지지 않는다고 아침에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도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장갑을 낀 채 조심조심 일하는 직원을 ‘일을 더디게 하는 원인’이라고 본 것이다.
작업반장은 “그렇게 몸 사리고 일하려면 이 일을 하지 말아야지”라고 한마디 더 했다.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인 그 직원을 다독인 사람은 부엌에서 그릇 종류를 정리하던 팀장 어르신이었다. “손 보호구로 쓰라”고 장갑을 주고는 반장에게 “작업할 때 미끄러진다고 착용하지 말라는 것이 더 이상하다”면서 “정말 그러면 비가 와도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장갑을 지급하라”고 점잖게 나무랐다. 반장은 그 묵직한 목소리에 한발 물러서면서도 한마디를 더 보탰다. “우리 때는 장갑 없이 일해도 아무 일 없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몸을 사린다”고 투덜거린 것이다.
작업용 보호구를 착용하려는 젊은 직원과 일의 성과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반장. 그리고 논쟁이 있을 때 방향성을 확인해 준 팀장 어르신. 이 세 사람을 보면서 정부가 2022년 11월 발표한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내용이 떠올랐다. 로드맵에서는 ‘생산’ 우선 관행과 ‘빨리빨리’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고, 안전보건 주체로서 근로자의 현장참여 및 실천적 행동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상황을 재해석하자면 △첫째, 반장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비가 내리는데도 평소대로 장갑을 끼고 작업한 직원의 행동에 아쉬움이 남는다. 작업 전 안전점검 회의(TBM)에서 반장의 지시가 이해되지 않았거나 부당하다고 생각될 때 즉시 질문을 했다면 작업 중 반장의 고함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TBM’은 작업 전에 관리감독자를 중심으로 작업자들이 모여 작업 내용과 안전작업절차 등에 대해 서로 확인하고 의논하는 활동이다. 구성원끼리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안전에 대한 자유로운 질문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것은 안전문화 정착의 시발점이다.
△둘째, 손 보호구인 장갑을 지급하고도 상황에 따라 맨손으로 작업하라고 지시한 반장에게 더 큰 아쉬움을 느낀다. 그는 반복되는 동일한 유형의 작업에서 ‘날씨’라는 외부 환경에 의해 보호구가 부적합해지는 상황을 이미 경험하고서도, 작업환경별로 적합한 보호구를 골라 사용하는 대신 그냥 맨손으로 작업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이다. 작업반장은 작업자의 안전보다 작업성과가 우선이라는 인식을 팀원들에게 드러냈다. 그는 관리감독자의 최소한의 의무인 유해위험 예방조치를 하지 않았고, TBM에서도 작업환경, 작업공구, 작업자용 보호구의 적합성을 확인하지 않았다. 요컨대, 안전작업을 위한 선제 조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 그렇다 해도 이사용역 작업팀의 미래가 희망적인 점은 이런 갈등 상황에서 작업시간 연장을 감수하면서까지 보호구를 착용하고 작업하게 한 팀장 어르신의 존재감이다. 그는 갈등 상황을 그냥 외면하지 않고 용기 있게 나서서 작업자들이 보호구를 착용하고 날씨 상황을 고려해 서두르지 않고 작업할 수 있도록 지시를 공개적으로, 그리고 명확하게 했다.
현장에서의 안전작업은 작업을 지시하는 관리감독자와 그 지시를 따르는 근로자에 의해 성취된다. TBM은 근로자의 활발한 참여와 토론식으로 진행돼야 한다. 관리감독자가 유해위험방지 업무와 작업 시작 전 점검사항 등을 꼼꼼히 이행하고, 필요한 경우 작업계획서를 작성해 근로자들을 교육한다면, 산업재해는 대부분 예방할 수 있다. 관리감독자의 진행이 부실하더라도, 작업을 수행하는 근로자들이 작업 전에 안전점검을 꼼꼼히 이행한다면, 산업재해의 상당수는 예방할 수 있다.
산업재해 당사자가 근로자인 현실에서, 근로자가 더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고 후에 남을 탓하기에는 근로자의 삶이 너무 허무해 보이기 때문이다.
최준환 DuPont Global Manufacturing SHE - Asia Pacific Region 듀폰코리아(주) 이사 / 전기안전기술사 / 산업안전지도사 최준환 울산과학대학교 겸임교수/ 기술사·듀폰산업안전연구원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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