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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소식/전문가 기고

조직학습을 위한 산업재해 조사보고서 [안전파수꾼]

 

 조직학습을 위한 산업재해 조사보고서 [안전파수꾼]

 

조직학습을 위한 산업재해 조사보고서

산업안전 분야에서는 ‘조직학습’의 효용성이 강조된다. 사업장을 방문할 때 “이번 사고를 통해서 많이 배웠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는 뒤늦은 자각이 덧붙여진다. 사고를 겪고 나서야 “안전비용이 비싸다고 생각된다면 사고를 한번 겪어 보라.”는 말의 본질적인 의미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연유인지 대부분 사업장은 다른 사업장의 사고에 관심이 많다.

국내 공정안전관리시스템에서는 공정사고가 발생하면 사고의 발생개요와 발생원인, 그리고 개선해야 할 내용과 재발방지책 등이 정리된 사고조사보고서를 작성한다. 사고 발생원인을 전문가들과 정확히 파악해서 동일한 또는 유사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수립하고, 이들의 정확한 이행 여부까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미국의 PSM Standard는 재발 방지 대책을 포함한 사고의 교훈과 연관되는 직무를 수행하는 모든 직원에게 사고조사보고서를 검토하게 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사고의 기억을 미래를 위한 학습기회로 활용한다.

대통령 직속의 독립적 연방 기관인 CSB에서는 화학사고에 대한 원인 조사를 수행하고 그 과정을 상세하게 정리한 사고조사보고서를 공개하고 있다. 필요한 경우 사고조사를 통해 파악된 발생 과정을 비디오 자료로 재구성하여 배포한다. 사고 발생 사업장의 경계를 넘어 관심 있는 모든 사업장이 비디오 자료를 통해 학습함으로써 다른 사업장의 사고를 통해 자기 사업장의 안전을 되돌아보는 도구로 활용한다. 안전보건공단에서도 CSB 사고사례 비디오 중 국내산업계와 연관성이 높은 사례에 대해 한글자막을 입혀 활용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BP의 Texas City 정유공장 사고 비디오가 좋은 사례다.

유럽에선 화학사고 예방과 사고로 인한 예상 가능한 결과를 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e-MARS라는 중대사고 보고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유해·위험한 물질과 관련된 실제 사고 또는 아차 사고 등의 조사를 통해 밝혀진 교훈들을 공유한다. 사고가 발생한 사업장에서 그 조사결과를 시스템에 직접 입력하면 모두가 시스템에 입력된 사고조사 내용을 볼 수 있다. 일본에서도 사고사례를 공유하는 시스템이 활용되고 있다. 후생성이 산업재해 사고사례를, 경제산업성이 가스 분야 사고조사보고서를 공개하고, 문부과학성은 산하 단체를 통해 ‘실패지식’이라는 이름의 사고사례 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중대 산업사고가 발생하면 사고가 발생한 사업장에서 자체조사에 나서고, 그 사업장의 사업과 연관된 정부 감독부처들이 각각 독자적으로 사고조사를 수행한다. 사고의 특성에 따라 고용노동부, 산업통상자원부, 환경부와 경찰청, 소방청까지 나서지만, 사고조사보고서를 공개적인 경로를 통해 구하기가 어렵다. 개별 사업장은 사고조사를 통해 밝혀진 상세한 내용을 다른 사업장과 공유하기를 꺼린다. 개인정보 또는 회사기밀이 포함된 자료라서 비공개로 관리한다는 설명이 일반적이다. 회사 평판 보호를 슬쩍 명분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소관법령에 따라 사고조사를 수행하는 안전보건공단, 화학물질안전원, 가스안전공사의 홈페이지에서는 각자 조사한 사고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가 있었다는 등의 기본적인 사항만으로 요약되어 있어 다른 사업장의 사고를 통해 교훈을 얻고자 하는 조직학습의 동기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사업장의 설명대로 개인정보 또는 사업기밀 때문이라면, 소관부처도 상세한 조사보고서를 공개하지 못한다면, 미국의 CSB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개인정보 또는 사업상 기밀을 보호하는 데 소홀하단 말인가?

생각을 바꾸자. 만일 어느 대형사업장에서 먼저 사고조사보고서를 공개하고 더 나아가 CSB처럼 사고과정을 재구성한 비디오 자료까지 만들어 활용한다면, 그 결단은 우리 산업안전 역사에 큰 족적으로 남을 것이다. 사고조사보고서는 공개해야 한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요즘 떠오르는 ESG 경영의 실천사례이기도 하며, 서로가 간접체험을 통해 사업장의 안전을 강화하는 상생의 안전문화 확산으로 이어질 것이다.

최준환 울산과학대 겸임교수, 한국방폭산업안전연구회 운영위원